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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북부여의 창건자이며 첫 단군이었다. 그는 환단고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고구려의 근본이였다. 고구려는 부여의 계승자로 고려하였다.

해모수(解慕漱)는 고조선의 44번째 구물 단군에 의해 창건된 진조선의 고조선 왕실의 구성원이였다. 그는 고열가 단군의 지배하에 23세의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고조선의 붕괴 시에 충성으로 제국에 봉사하였다.

세 왕국으로 나뉘었던 고조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중심 왕국이였던 진조선은 군대가 더이상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상황으로까지 붕괴하였다. 그는 더이상 제국의 통제 내에 있지 않았음을 알고 고열가 황제는 권력을 버리고 제국을 오가의 손에 넘겼다. 다섯 명의 중앙 귀족, 오가 아래에서 군대의 장군과 지도자들은 떠나서 반란을 일어키기 시작하였다.

제국을 마지막으로 떠난 이가 해모수였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장군이 되었다. 해모수는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떠났다. 해모수와 그의 군대는 장당경 요새로 가서 왕궁을 지었다. 그 곳에서 해모수는 천왕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황제와 동등한 칭호이다. 해모수는 그의 동료 고조선 장군들의 반란을 대부분 격파하고 진조선 영토의 대부분을 다시 차지하였다. 이로 인해 천왕랑 해모수는 다섯 명의 중앙 귀족에게 북부여의 이름 아래에 고조선을 재건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북부여를 창건한 후 해모수는 고열가 황제가 돌아올 것을 6년을 기다렸다. 전 황제가 정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단군의 칭호가 주어졌다.

해부루와의 관계[]

해부루는 북부여 네번째 단군 고우루의 동생이였다. 기원전 86년 고우루가 죽자 그의 동생 해부루는 왕좌에 올라 북부여의 단군이되었다. 그러나 그해 고열가의 후손 고두막이 반란을 일으켜 왕좌를 차지하고 해부루를 동쪽으로 밀어냈다. 해부루는 그의 추종자와 약갼의 백성들을 이끌고 동해 근처의 가섭원으로 이동하였고 동부여를 창건하였다.

북부여를 지배하기 위해 온 동명왕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해부루는 북부여의 도독으로 동명단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왕이라는 직위를 사용하였다.

고 주몽과의 관계[]

주몽불리지로도 알려진 고모수의 아들로 옥저후였다. 불리지는 고진 왕의 손자였는데, 고진은 해모수의 차자였다. 고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결혼하였지만 그들의 아이 주몽을 볼 수 있기 전에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고주몽은 결국 동부여에서 자랐고 동부여 왕자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탈출하였다. 경계를 넘어서 그는 북부여로 들어 갔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6번째 단군 고무서의 환영을 받았다. 고무서 단군은 그의 두번째 딸 소서노를 주몽과 결혼시켰다. 고무서가 아들없이 죽자 주몽은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되었고 결국 이웃 왕국을 정복하고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창건하였다.

전설[]

삼국사기에 따르면 해모스는 고구려의 창건자 동명성왕 주몽의 아버지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는 하늘의 아들로 오룔거를 타고 홀승골에 기원전 58년 도착하여 북부여를 열었다. 해모수는 그의 왕국 북부여의 많은 적들을 정복한 숙련된 전사이자 뛰어난 궁사였다.

그러나 해모수는 중국의 기록이나 광개토 대왕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고구려는 부여를 정복한 후에 부여의 건국 전설을 수집하였다고 생각된다.


죽음[]

단군 해모수는 기원전 195년에 죽었으며, 그의 연장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북부여의 제 2 통치자인 부여의 모수리가 되었다. 틀:부여왕

전 임
고열가
부여의 단군
후 임
모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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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Hae Mo-su of Buyeo vi:Hae Mosu zh:解慕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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